
경영자로서 허 사장의 탁월함은 이처럼 조직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핫 스폿’ 을 한눈에 파악하는 감각을 갖췄다는 점이다. 먼저 ‘핫 스폿’을 발견해 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의 컨센서스를 이끌어 낸 뒤 매몰차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타고난 감각으로 진맥을 한 뒤 비방을 내리는 명의(名醫)를 연상시킬 정도다.
— LG전자 TV사업부장(전무급)으로 근무하던 구미시절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구미 TV공장으로 발령을 받은 시점이 1998년 1월이었어요. 국제통화 기금(IMF) 관리체제의 한파로 TV사업부문 역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 어떤 처방을 내렸는지.
“구미공장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3개월 순환 휴직제를 실시했습니다. 상당한 반발을 각오했었지요. 그런데 의외의 방향으로 일이 풀리더군요.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는 혼연일체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어요. 휴직 중이던 직원들까지 회사에 나와 무급 봉사를 하기 시작했을 정도입니다.”
2년여 각고의 노력끝에 TV공장이 정상화되면서 한숨을 돌리고 있던 허 사장은 2000년 1월 LG마이크론의 사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48세의 젊은 나이에 대기업 사장이 됐다는 뿌듯함도 잠시. 허 사장은 막막한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다.
— LG마이크론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거기도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대우그룹 파산의 직격탄을 맞았어요. LG마이크론이 지니고 있던 수백억 원의 대우채가 휴지조각이 될 상황이었어요.”
— 어떻게 극복했는지.
“모든 직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솔직하게 상황을 알렸습니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협조를 구한 거지요. 또다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야근을 자청했습니다. 그러면서 품질개선도 되고, 생산성도 올라갔지요. 그 덕에 LG마이크론은 1년 만에 유동성 위기를 말끔히 털어내면서 주식공개상장(IPO)까지 실시하는 우량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
허 사장은 아주 맹렬하게 일을 몰아붙이는 타입이지만 감성(感性 ) 리더십의 중요성도 꿰뚫고 있는 경영자다. 무작정 “나를 따르라”며 혼자 앞장서는 게 아니라 설득하면서 함께 뛰는 스타일인 것이다.
— 감성 리더십의 중요성을 깨우친 것은 언제입니까.
“4년 전쯤 LG이노텍 부품사업 본부장으로 광주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아주 유능한 책임 연구원 한명이 불쑥 사표를 던졌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매일 밤늦게 퇴근하는 것에 대해 아내의 불만이 심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때 회사가 보살펴야 하는 것은 직원들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대상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시의 일을 교훈삼아 LG이노텍 사장으로 취임한 뒤 ‘맞춤형 리더십’ 제도를 도입했지요.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책임자인 ‘체인지 에이전트(Change Agent)’ 제도와 고참 직원들이 신참들의 직장생활 및 개인적인 고충을 상담해주는 ‘ 멘토(Mentor)’제도가 맞춤형 리더십의 양대 축입니다.”
맞춤형 리더십의 결실은 풍성했다. 2002년 2월 그가 LG이노텍 대표이사를 맡을 당시 3000억 원 정도에 불과하던 매출은 4년만인 지난해 1조 원대로 치솟았다. IMF 관리 체제 이후 지속된 전기전자 부품소재 산업의 불황 속에서도 연평균 40%의 매출 신장이라 는 창사 이래 초유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지난 세기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했던 ‘하면 된다’를 21세기식의 세련된 표현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허 사장은 이를 ‘이노베이션 빅뱅’으로 표현한다. 경영혁신프로그램인 이노베이션 빅뱅을 수단으로 글로벌 1등 기업’으로 올라서겠다는 포부다.
“2006년은 LG이노텍의 ‘글로벌 기업 도약 원년’입니다. 이노베이션 빅뱅을 통해 2007년까지 매출 2조원 달성과 함께 ‘넘버 원 프로덕트, 넘버원 퀄리티, 넘버원 피플(일 등 제품, 일등 품질 , 일등 직원)’의 3대 목표를 이룰 겁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려면 또다시 매년 40% 이상의 매출 신장률을 기록해야 한다. 허 사장의 솜씨를 한번 지켜보자.
박상주 기자 sjp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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